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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8-10-02 16:00:43
제목 새로운 평화와 통일의 시대, 노동자민중이 주역이 되어야
첨부파일 jpg 독일통일.jpg (49.23 Kb)
내용


[평화누리통일누리]


새로운 평화와 통일의 시대,

노동자민중이 주역이 되어야

 

- '평화시대, 공공운수노동자의 과제 토론회'를 다녀와서

 

김강연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사무처장

 

 

지난 829일 전국공공운수노조 반전평화통일위원회 주최로 <평화시대, 공공운수노동자의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를 진단하고 새로운 평화통일운동의 주역으로서 공공운수노동자의 과제를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개최되었는데, 고영대 공동대표가 <'평화와 번영의 시대' 실현과 노동자민중의 역할>이라는 내용으로 주 발제를 진행하였다. 이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고영대 공동대표는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으로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대해 '지난 70년 넘게 분단과 대결에 기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냉전수구세력이 약화되고 노동자민중이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 시대를 주도해 나갈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 시대는 노동자민중의 이해에 가장 부합하는 시대이고, 노동자민중이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장이 열릴 수 있는 정세임을 강조했다. 만약 노동자민중이 평화와 통일의 과정에 주동성을 발휘해 나가지 않는다면, 그저 소극적이거나 수수방관만 한다면, 평화와 번영의 시대는 정권과 자본이 주도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는 노동자민중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기보다 기득권의 이해만 대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미군정 하에서 사회주의적 경제요소가 담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제정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압력에 의해 헌법이 개정된 역사가 있다. 또 독일 사민당(사회민주당)이 동맹을 용인하면서 흡수통일을 수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민당과 노동조합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결과 노동조합의 토대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독일의 사례도 있다. 고영대 공동대표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왜 노동자민중이 평화와 번영, 통일의 주역이 되어야하는지를 절절히 호소하였다.

 

많은 참석자들이 고영대 공동대표의 발표를 듣고 나서 평화와 통일에 있어 노동자민중이 정치적 주도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 중요한 지점을 제기해 주었다며 매우 유익하고 의미 깊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준비한 내용에 비해 배정된 시간이 제한되어 충분한 내용을 전개하지 못해 발제자나 토론자 모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9월19일 평양시 5.1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하러 온 평양시민이 문재인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사진=KTV화면캡쳐)

 


미국의 압력에 의한 헌법 개정과 시사점

 

박명림 교수의 '민주공화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자유민주기본질서'(2011. 10. 28) 논문 내용에 따르면, 1954년 미국의 압력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되었다고 한다. 1948년 제정된 제헌 헌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동시에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제헌 헌법 87조로, 그 내용을 보면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제헌 헌법의 경제조항들에 대해 '일종의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 헌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Report on Economic Provisions of the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1954. 3. 24). 19538월 방한 한 미한제단의 키니는 제헌 헌법의 국유화 조항 등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승만 정권은 1954123일 경제부분에 한정된 개헌안을 제출하였고, 격렬한 '국체 대논쟁' 끝에 결국 19541129일 개정 헌법이 통과되었다. 헌법 개정에 대해 주한미대사관의 보고(1954. 3. 5) 내용을 보면 미국이 대한민국 헌법에 들어 있는 '국가소유와 통제를 사적 소유 및 자유기업으로 대체' 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시키기 위해서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게 헌법 개정을 요구했고 실제로 관철시킨 것이다. 사유제도를 장려한 한미합의의사록 4항을 실현시킨 것인데 한미합의의사록이 체결된 후로부터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와 같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영대 공동대표는 참가자들에게 "대한민국 헌법은 미군정 하에서 준비되고 제정되었다. 어떻게 미군정 하에서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헌법에 반영될 수 있었을까? 왜 당시 미군정은 이것을 손놓고 보고만 있었을까? 왜 미국은 (헌법이 제정된 지) 6년이 지난 1954년이 돼서야 헌법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려 했고, 그것이 관철됐을까?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해방 직후 한국 민중들의 77%가 사회주의를 찬성(1946, 미군정청 여론조사)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미군정이라 해도 민중들의 지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우파에 속했던 '김구 선생이나 한민당까지도 국유화를 중심으로 해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을 인정'(박명림, 민주공화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자유민주기본질서, 2011. 10. 28) 하고 헌법을 준비했다. 이것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서야 미국은 대한민국 헌법 개정을 시도하게 된다.

이 역사가 시사하는 바는 한 사회의 체제와 제도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그 시대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지향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도래할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에서 통일의 과정도, 통일 한반도의 상도 대다수 노동자민중에 의해 제기되는 방향으로 수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굴욕적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합의의사록 체결

한미동맹의 법적 근거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1953년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이승만 정권이 미국 아이젠하워 정권에게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정권은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원치 않았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아이젠하워 정권의 입장을 돌리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 미일안보조약에 준해서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구 미일안보조약은 195198일 체결된 것으로 주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군에 대해 일방적 주병권(타국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하게 할 수 있는 권리)을 보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도 동일하게 들어가 있다.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었다. 그래서 미군이 점령군, 승전군으로서 일본을 점령하였고, 일본의 주권이 부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패전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전범국인 일본이 체결한 것과 같은 굴욕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1960년 들어 주권침해적인 구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였지만, 한국은 여전히 이런 굴욕적인 상호방위조약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굴욕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3. 10. 1)하고도 부족해서 한미합의의사록까지 체결(1954. 11. 17)하고 나서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효시켰다. 한미합의사록 1항에서는 한반도 통일에 미국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독일도 분단국가였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범 국가였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권한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같은 승전국이 갖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한국은 통일에 대해 제약을 받을 아무런 국제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한미합의의사록에서 미국과 협의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2항에서는 군사주권의 핵심인 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3항에서는 국군 병력과 기준의 원칙을 수락한다고 하고 있다. 4항에서는 투자기업의 사유제도를 계속 장려한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통일, 군사, 경제 문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고 나서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효시킨 것이다.

 


 

당시 미 군정 청 여론국이 조선인민이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세 가지 항목을 열거하고 여론을 조사하였다. 그 중 세 번째 질문은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것이었고, 선택지는 가)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였다.

답변 결과 자본주의(1,189, 14%), 사회주의(6,037, 70%), 공산주의(574, 7%), 모릅니다(653, 8%)였다. < 출처: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1989년 11월 9일 동독과 서독 간의 자유 왕래가 혀용됨에 따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시작했다.(사진=구글이미지)

 

독일 통일 과정의 교훈 - 동맹을 수용한 사민당

 

고영대 공동대표는 독일 통일 사례를 소개하며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독일 사민당 정권이 미국의 나토 동맹을 용인하면서 안보, 경제정책에서 우경화 되었고, 노동자들을 배반하게 되었다. 또한 통일과정에서도 미국과 서독의 일방적인 흡수통일을 사민당과 노동조합이 주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1949년 정권을 잡은 서독 아데나워 기민당(기독교민주연합) 정권은 노골적인 친서방 정책을 표방하며 철저하게 동독에 대해 '힘의 우위' 정책을 추구했다. 그 상징적인 조치가 서독 재무장과 나토 동맹 가입(1954)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던 독일 공산당을 해산시켰다. 아데나워 정권은 서독을 미소 냉전 대결의 유럽 발판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구상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에 대해 사민당(사회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슈마허 당수부터 그것을 절충하고 사실상 용인하는 행보를 취했다. 그 결과 서독 재무장을 반대하는 독일의 다수 대중들의 뜻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재무장과 나토 가입을 막지 못했다.

그 뒤 사민당은 고데스베르그 강령 변경(1958)을 통해 시장경제와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부터 사민당은 나토라는 미국 중심의 동맹체제의 덫에 걸려들기 시작했다. 그 후 10여년 만에 사민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당시 슈미트 총리는 사민당 내 반대세력과 부딪히면서까지 미국이 추진하는 퍼싱-2 전역 핵미사일 배치를 수용했다. 급기야는 전 수상인 빌리브란트를 필두로 한 퍼싱-2 핵미사일 배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색깔론까지 이용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언론과 제도권 연구자들이 나서서 평화운동에 대한 색깔론 공격을 막아주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1970-1980년 사이에 평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부분들이 언론과 연구기관에 들어가서 퍼싱-2 핵미사일 배치의 문제점에 대한 정론을 써냈고, 퍼싱-2 핵미사일배치 반대운동에 가해지는 부당한 색깔론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민중들이 슈미트 정권에 반기를 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 민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민당은 동맹을 용인했고, 1989년 이후 기민당과 이를 뒷받침하는 미국에 의해서 추진되는 일방적인 흡수통일에 대하여, 사민당과 노동조합은 속수무책이었다.

 

독일 통일이 합의통일이라고? - 강압적 흡수통일의 폐해

 

박근혜 정권은 2014년 북에 대한 흡수통일인 '통일대박론'을 들고 나왔다. 고영대 공동대표는 "일부 노동조합에서 행여나 일자리가 늘어날까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북한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켜서 북을 배제하고 흡수통일 한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하며 독일 기민당과 콜 정권도 이와 똑같은 정책을 추진했다고 했다.

또한 고영대 공동대표는 "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을 추진했던 당시 통일부장관들이 '통일대박론'이 주장될 당시 언론에 나와, 독일이 선거 방식으로 통일을 했기 때문에 흡수통일이 아니라 합의통일이라고 주장하며 우리도 독일 방식으로 통일하면 합의통일이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콜 기민당 정권은 미국 부시 정권과 서독 마르크화의 힘을 믿고 조기 흡수통일을 밀어붙였다. 사민당과 나머지 야당, 모든 사회단체는 콜 정권의 조기 흡수통일에 대해 반대했다. 콜 정권은 조기 흡수통일을 위해 동독 모드로 정권의 경제지원 요구를 거부하고 시장경제 도입과 조기 선거를 요구했다.

이 선거가 1990310일 실시된 선거인데,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고, 콜 기민당은 3, 4위 밖에 되지 못했다. 콜은 이것을 일거에 뒤집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폈는데 다름 아닌 서독 마르크화를 동독 마르크와 11로 교환해주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1990. 2. 7) 그 당시 서독의 중앙은행총재를 비롯한 서독 대다수가 31 또는 41로 바꿔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콜은 서독 마르크화를 원하는 동독 주민들의 요구에 영합했다. 결국 동독 주민들은 서독 마르크화를 이용해서 자신의 재산과 임금을 높여보겠다고 서독으로의 편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후과를 불러왔다.

11로 마르크화를 교환하다보니 생산성이 낮은 동독 기업에 엄청난 부담을 가져 왔고, 상품가격과 임금이 뛰며 동독의 기업은 줄 도산을 했다. 당시 동독에는 950만의 경제인구가 있었는데 불과 1~2년 사이 3분의 1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고, 동독경제에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11의 마르크화 교환이 동독 주민의 포퓰리즘과 영합함으로써, 동독경제와 서독경제를 지금까지도 힘들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11 화폐 교환을 통해 동독 정권에게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게 하고 선거를 앞당김으로써, 조기에 동독 체제가 종식되도록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따라서 동독의 변화를 동독 자율에 맡긴 것이 아니라 서독 마르크화로 힘으로 동독에 시장경제를 강제한 것이지, 선거에 의한 합의통일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반면 콜 정권의 조기 흡수통일 기도에 대해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대응은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당시 동독은 사회주의 민족과 자본주의 민족은 다르다는 희한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통일에 소극적이었다. 사민당은 이런 동독의 입장을 인정하고 통일을 장기적, 점진적으로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 사민당을 지지했던 다수의 노동조합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평상시부터 통일에 대한 고민과 주체적인 준비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격하게 추진되는 통일에 대해 아무런 정책적 대안을 갖지 못한 채 대중들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사민당과 노동조합은 서독의 사회보장을 동독 주민에게 똑같이 보장할 것만 외쳤을 뿐, 콜 정권의 조기 흡수통일 주장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결과 사민당과 노동조합은 막강한 조직력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참패를 하게 되었다.

 

통일 이후 동독의 노동자들 중 40%이상이 해고되었고, 40%에 이르는 노동조합 조직률은 동독 경제가 무너지고 그 후과가 지속되면서 지금은 노조 조직률이 20% 이하로 하락했다. 슈뢰더 사민당 정권은 '3의 길'을 표방하면서 '아젠다 2010''하르츠 개혁'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 결과 실업보조금 지급 기간 단축, 미니잡(750만개) 급증, 비정규직 증가, 소득 불균형과 사회 양극화 심화, 빈곤율 상승 등으로 사회복지와 노조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노동조합이 통일과정에 주동적으로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일관한 것이 노동조합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독일의 사례에서 우리가 되새겨 봐야 할 점은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정권에 맡김으로써 노동운동이 약화되는 독일과 같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이 정부의 통일 정책에 적극 개입하고 평화 통일 운동을 적극 펼침으로써,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에 부합하는 통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자와 민중이 새로운 평화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제헌 헌법 87조가 삭제된 과정을 알게 되면서 전쟁과 분단, 대결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정치적(전략적) 주도권이 어떻게 상실되어 나갔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분단과 대결 속에서는 노동운동조차 빨갱이로 색깔론 공격을 당하는 현실에서 노동자민중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고, 계급적 이해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할 수 있었다